유동근목사

살아계신 하나님

by 윤성현posted Nov 29,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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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말씀 왕상 17:1-7
설교일자 2009-11-29
설교자 유동근목사
영상 주소 http://media.busanenm.or.kr/busanenm/mes...1129_y.mp4



살아계신 하나님(왕상17:1-7)

오늘 본문 1절을 보면 엘리야라는 인물과 아합이라는 인물이 나온다.
이 아합은 북이스라엘의 7대왕이다.
그런데 이 아합 왕의 아버지 오므리 왕이 시돈(페니키아)과 정치적인 동맹관계를 맺기 위해 정략적인 이유로 자신의 아들 아합을 시돈왕의 딸 이세벨과 결혼시켰다.

이 결혼으로 인해서 이스라엘은 정치적으로는 안정이 되었다.

그러나 이세벨이 아합과 결혼하게 되자 이스라엘의 신이 마치 바알인 것처럼 북 이스라엘의 수도 사마리아에 바알의 신전을 세웠다.

아합과 이세벨의 결혼으로 말미암아 이스라엘에 바알 숭배가 공식적으로 들어오는 계기가 되었던 것이다.

성경학자들은 이세벨이 바알의 여대제사장 지위를 누렸을 것이라고 말한다.

다시 말하면 아합과 이세벨은 여호와하나님 대신에 바알을 이스라엘의 민족 신으로 만들려고 한 것이다.

뿐만 아니라 아합은 이스라엘 땅에‘풍요의 여신 아세라 목상’도 세웠다.

하나님은 이런 아합과 이세벨의 행동에 대해“분노하셨다.”이렇게 33절에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아합은 자기의 이런 모든 행위에 대해서“가볍게 여겼다”(16:31)이렇게 성경은 기록하고 있다.

“가볍게 여겼다”는 말은 히)원어 적으로 ‘아무 것도 아닌 것으로 여겼다.’는 뜻이다.

하나님은 아합의 행동에 분노하셨지만 아합은 자신이 바알을 섬기고 바알의 신전을 세운 행동을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여겼다는 것이다.

가나안의 자료들을 보면 바알 신은 번개와 폭풍의 신으로 비를 내리는 신이다.

그런데 엘리야가 여호와의 사심을 가리켜 맹세하며 자신의 말이 없으면 수년 동안 비와 이슬이 내리지 않을 것이라고 말한 것이다.

엘리야의 이 선포에는 중요한 의미가 숨겨져 있다.

지금 아합과 이세벨이 이스라엘의 민족신을 바알로 바꾸어 놓으려는 상황에서 엘리야가 가뭄을 선포함으로 하나님만이 이스라엘의 참 신이심을 선포한 것이다.

바알이 자연을 다스리는 것이 아니라 여호와 하나님이 자연을 다스리는 살아계신 하나님 이신 것을 선포한 것이다.
엘리야처럼 하나님만이 참신이라고 세상에 선포할 수 있는 저와 여러분 되기를 축복한다.(우리의 보모님들께, 육신의 형제들에게, 친척들, 친구들에게)

그러면 여호와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이나?

첫째로 하나님은 피난처를 주시는 하나님이다.

3절에서 하나님은 “너는 여시서 떠나 동으로 가서 요단 앞 그릿 시냇가에 숨고”이렇게 말씀하셨다.
엘리야에게 너는 그릿시냇가에 가서 숨으라고 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볼 때 엘리야의 가뭄에 대한 경고가 있은 후에 아합과 이세벨의 즉각적이 위협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엘리야는 두려웠을 것이다.
자기 혼자 한 나라의 왕과 왕비를 향해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여호와라고 선포하고 있는 것이기 때문에 더더욱 두려웠을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렇게 두려워하고 있는 엘리야에게 그릿 시냇가를 준비해 놓으셨다.
그리고 그릿 시냇가를 엘리야의 피난처로 삼아 주셨다.

그릿 시냇가에 엘리야의 피난처를 준비해 주신 하나님은 지금도 하나님 안에서 어려움을 당하는 모든 사람들을 위해 피난처를 준비해 주신 줄로 믿는다.
폭풍이 심할 때는 어부들은 배를 항구 한 곳으로 가져다가 단단히 붙들어 매 둔다.
그러면 폭풍이 불고 파도가 높아도 배는 안전하다.
마찬가지로 하나님도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들을 십자가에 단단히 매 어 주셨다.

우리도 이 세상에 사는 동안에 하나님이 십자가에서 우리를 반드시 지켜 주실 것이다.
그렇다.
하나님이 하나님의 자녀들을 위해 준비해 주신 피난처가 바로 십자가다.
이 십자가는 예수님 세상을 이긴 장소다.
이 십자가는 예수님이 인류의 죄의 형벌을 담당한 장소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모든 저주를 끊어 주신 장소다.
그렇기 때문에 십자가 밑에 있는 하나님의 사람은 안전하다.

저와 여러분의 피난처는 어디에 있습니까?
하나님이 마련해 주신 완전한 피난처에 피하는 여러분 되기를 축복한다.
이사야 선지자도 "보라 하나님은 나의 구원이시라 내가 의뢰하고 두려움이 없으리니 주 여호와는 나의 힘이시며 나의 노래시며 나의 구원이심이라 그러므로 너희가 기쁨으로 구원의 우물에서 물을 길으리로다"(사12:2-3)이렇게 말했다.

십자가 밑에 있는 저와 여러분은 안전한 줄로 믿는다.
예수님의 십자가만이 인생의 피난처이신 줄로 믿는다.

둘째로 하나님은 공급해 주시는 하나님이시다.

4-6절에서“4그 시냇물을 마시라 내가 까마귀들을 명하여 거기서 너를 먹이게 하리라 5저가 여호와의 말씀과 같이 하여 곧 가서 요단 앞 그릿 시냇가에 머물매 6까마귀들이 아침에도 떡과 고기를, 저녁에도 떡과 고기를 가져왔고 저가 시내를 마셨더니”이렇게 기록 되어 있다.

그릿 시냇가는 요단 동편에 있는 건천이다.
비가 올 때만 잠간 흐르는 시냇가다.

그런데 왜 하나님이 엘리야를 그런 광야의 시냇가로 가라고 하셨나?
하나님이 엘리야의 안전만을 위해서 사람이 없는 광야로 가라고 하신 것이 아니다.
안전만을 위하셨다면 아마 좋은 곳에 가서 숨으라고 하셨던지, 누구 누구의 집에 가서 숨으라고 하셨을 것이다.
하나님은 광야 그릿 시냇가에서 하나님만이 엘리야의 완전한 공급 자 이심을 가르쳐 주시며 광야에서 엘리야를 하나님의 사람으로 준비시키셨던 것이다.
모세도 바로가 무서워 광야로 도망갔다.
그러나 하나님은 모세를 광야에서 준비시키셨다.
그리고 무서워 도망갔던 바로 앞에 담대히 세우셨다.
다윗도 광야에 있었기 때문에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사람이 되었다.
그렇다. 하나님은 때로 우리를 광야로 인도하실 때가 있다.
그러나 그것은 광야에서 공급하시는 하나님을 신뢰하는 하나님의 사람이 되게 하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놀라운 계획이다.
부족함 속에서 하나님이 나의 완전한 공급자 이신 것을 깨달으면 우리는 하나님만 의지하게 되고 사람과 환경 앞에 담대하게 되는 것이다.
하나님만이 철저한 공급이심을 깨닫게 엘리야는 왕상 18장에서 바알의 제사장 450인과 아세라의 선지자 400, 도합 850대 1의 능력 대결에서 승리하는 사람이 되었던 것이다.

인생의 광야 속에 있나?
살아계신 하나님을 만나고 그 하나님의 능력을 품는 시기가 되기를 축복한다.
반드시 엘리야와 같이 능력있는 하나님의 사람이 될 줄로 믿는다.

6절을 보면
하나님은 까마귀를 통해서 엘리야에게 하루에 두 번 아침과 저녁 떡과 고기를 먹여 주셨다.
까마귀라는 단어는 히)원어적으로‘아랍인들’이라는 뜻과‘상인들’이라는 뜻이 있다.
그래서 성경학자들 중에는“하나님이 까마귀를 통해서 엘리야를 먹이셨다.”는 말을‘그릿 시냇가를 지나는 아랍의 장사꾼들을 통해서 하나님이 먹이셨다.’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러나 대부분의 성경학자들은 까마귀를 까마귀로 읽어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까마귀는 하나님께서 레11:13,15에서는 부정한 새라고 말씀하신 새다.
까마귀는 섞은 고기를 먹는 지저분한 새다.

그리고 창8장에서는 노아가 비가 멈추고 배가 아라랏 산에 머물게 되자 의리를 저버린 새다.
노아가 홍수가 끝나고 땅의 형편이 궁금해서 까마귀를 내보냈을 때 까마귀는 노아에게 돌아오지 않았다.
노아가 궁금하던가 말던가, 배에 있는 노아의 식구들과 다른 짐승이 힘들거나 말거나 까마귀는 노아에게 돌아가지 않고 땅이 마를 때까지 날아 다녔다.
까마귀는 노아의 은혜와 수고도 생각하지 않았다.
까마귀는 이렇게 이기 적인 새다.
그런데 왜 하나님은 부정하고 지저분한 새 그리고 이기적인 새, 까마귀를 사용하셨나?
까마귀가 부정한고 지저분한 새, 그리고 노아 이후로 의리없는 새라는 생각을 하지 못했다면 아마 엘리야는 까마귀를 의지했을 것이다.
돌아오지 않을 까봐 두렵고 걱정이 돼서 자기 음식을 나눠주고 엄청난 관심을 기울였을 것이다.
그러나 까마귀가 부정하고 지저분한 새기 때문에 엘리야는 날라다 주는 음식만 받아먹었을 것이다.
하나님은 엘리야가 하나님만이 엘리야의 완전한 공급자이심을 깨닫기 원하셨던 것이다.
제게 경제적으로 어려워 보이는 형제를 위로하고 필요가 있으면 가지고 있는 것을 좀 나누기 위해서“요즘 괜찮아?”라고 물었다.
그랬더니 그 형제가 “까마귀가 왔다 갔습니다.”라고 말했다.
저에게도 가끔 까마귀가 날아온다.
그런데 대학 다닐 때부터 개척할 때까지는 많은 까마귀들이 날라 왔다.

그런데 까마귀가 자꾸 날아오다 보니까 하나님을 의지하기 보다는 형편이 좀 어려워지면 까마귀가 안 날라 오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되기도 했었다.
하나님은 오늘 말씀을 통해 하나님만이 저와 여러분이 공급자이신 하나님만 의지하기 원하신다.
하나님만이 완전한 공급자이시다.
하나님 의지해야 할 줄로 믿는다.

우리가 자꾸 옆에 사람 까마귀 만들어 놓으면 하나님께서 그 사람을 흰마귀로 바꾸어 놓으실 것이다.
물론 하나님은 우리가 다 하나님의 까마귀가 되기를 원하신다.
요일3:17에서“누가 이 세상 재물을 가지고 형제의 궁핍함을 보고도 도와줄 마음을 막으면 하나님의 사랑이 어찌 그 속에 거할 까보냐”이렇게 말씀하셨다.

눅6:38에서도“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줄 것이니 곧 후히 되어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 하여 너희에게 안겨 주리라 너희의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도 헤아림을 도로 받을 것이니라.”이렇게 말씀하셨다.
하나님의 까마귀가 되는 저와 여러분 되기를 축복한다.

그러면 어떻게 까마귀가 엘리야에게 아침, 저녁마다 음식을 날라다 주는 일이 가능 할 수 있었나?
4절에 보니까 하나님이 “내가 까마귀를 명하여 ”이렇게 말씀하셨다.
하나님이 명하셨기 때문이었다.
하나님이 명령하시기만 하면 지금도 까마귀가 저와 여러분에게도 필요한 것을 날라 올 줄로 믿는다.
고대 팔레스타인에서 하루에 두 번 고기를 먹는 식사는 부자들의 식사음식이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릿시냇가에 숨은 엘리야에게 이처럼 너그럽게 공급해 주셨다.
엘리야는 까마귀까지도 순종케 하셔서 자기를 먹이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보며 하나님의 사랑을 깨달았을 것이다.
살아계신 하나님의 보호 아래서 살고 있음이 감격스럽고 기쁨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아합과 이세벨에게 더욱 더 살아계신 하나님을 깨닫도록 해야겠다는 용기를 얻었을 것이다.
하나님은 까마귀를 통해서도 역사하시는 하나님이시다.
이 하나님이 저와 여러분에게도 역사하실 줄로 믿는다.


중국 내지 선교사 허드슨 테일러는 일이 점점 많아지면서 더 많은 협력자와 선교비가 필요했다.
그러나 허드슨 테일러를 도와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허드슨 테일러는 정신적인 부담이 너무 커져서 밤잠을 설치고 마침내는 신경쇠약에 걸릴 정도가 되었다.
그런데 어느 날 성경 요한복음 15장을 읽어 내려가다가 5절에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 라고 하는 이 말씀이 가슴에 “확”와 닿았다.
마치 허스든 테일러의 마음에 태양 빛이 비취는 것처럼 마음이 환하게 밝아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허드슨 테일러는 "주님은 포도나무이시고 나는 그 가지인데 내가 걱정할 것이 무엇인가?
주님께서 수분과 영양분을 공급해 주는 나무라면 가지인 나는 그것을 받아들이기만 하면 되는데 가지인 내가 수분과 영양분을 다른 가지에 공급하려고 애쓰고 있다니 참 어리석었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리고 나서 허드슨 테일러는“ 주님! 이 시간부터는 염려와 근심을 포도나무 되신 주님께 맡깁니다. 책임져 주시옵소서.”라고 기도하고 모든 문제를 주님께 맡겼다.
그러자 마음에 평안이 파도처럼 밀려왔다.
그는 그 후부터 기도하는 것마다 응답 받고 성공적인 중국 선교를 할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포도나무시다.
우리는 포도나무의 가지다.
포도나무되신 하나님이 우리의 공급자가 되시는 줄로 믿는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약속의 땅 가나안으로 인도하실 때도 광야에서 만나와 메추라기를 먹여 주시고 반석을 터뜨려 생수를 마시게 하셨다.
하나님은 자신의 백성들의 필요를 공급해 주시는 살아계신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들의 피난처를 예비해 두시는 살아계신 하나님이시다.
이 하나님이 저와 여러분의 피난처도 준비해 주신 줄로 믿는다.
이 하나님이 저와 여러분의 필요도 공급해 주실 줄로 믿는다.